가을 내내 쑥부쟁이와 무당거미, 무당거미가 빚은 황금빛 거미줄로 눈부시던 북한산대피소는 11월에는 그사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황량하다. 이 계절이면 숲의 어딘들 쓸쓸하지 않을까마는 이곳은 특히 쑥부쟁이꽃들이 보리밭처럼 일렁이던 곳이라 유난히 텅 비어 보인다. 한해살이 꽃이 진 자리는 바짝 마른 갈색 풀줄기와 어둡고 축축한 흙바닥뿐. 그래도 씨앗과 애벌레들이 거기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대피소에서 용암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간다. 3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성 안은 이제는 병사도, 막사도, 함성도 없이 뿌연 먼지만 가득하다. 멀리 노적봉이며 의상봉, 용혈봉, 염초봉들은 사라지려는 듯 희미하지만 먼지로도 그것들의 수려함을 가릴 수는 없어 내내 감탄하며 산길을 오르다보니 어느 새 백운봉 암문. 암문에서 성을 나와서는 평소처럼 곧바로 백운산장을 향하려다 무슨 마음이 들어 이번에는 밤골 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20여분을 걸었을까,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바위. 내가 그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가 내게 와락 달려든 것만 같다. 숨이 다 막힌다. 인수봉이다.
푸르디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왔던 내 열아홉이 떠오른다. 반지하 단칸방이 빼곡이 들어찬 좁은 골목을 아침저녁으로 들고 날 적이면 이 도시에서 어떻든 살아남아야한다는 각오, 자식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님을 염두에 두고 늘 비장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골목을 걷다보면 고개는 자꾸 수그러들고,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건 복잡한 전깃줄이 횡으로 종으로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좁은 골목길 끝 낡은 철로에 화물열차가 나타날 때였다. 정선이니 삼척이니 하는 먼 곳에서 시멘트를 실어 오는 그 회색 화물열차가 느리게 허공을 가르며 골목을 지나갈 때면 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목이 메어, 그 길로 현상수배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급히 열차에 숨어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고만 싶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인수봉을 대하자 그때 서울에서의 나의 열아홉이 떠오르며 화물열차에 묻어오던 그때의 그리움과 서러움도 함께 떠오르던 것이다. 그렇다면, 개미처럼 다닥다닥 바위에 달라붙어 인수봉 꼭대기를 향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인의 시에서처럼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요량으로 저렇듯 애써 오르는 걸까. (김사인, ‘코스모스’)
아래로 좀 더 내려가자 인수봉의 뿌리를 따라 나선형으로 깊고 긴 주름이 나있다. 사람이 그의 주름에 발을 딛고, 두 손으로는 할퀴듯 그의 몸을 움켜잡고 그를 오르고 있다. 그의 주름은 아마도 그의 고뇌, 그리고 그의 고뇌는 그의 탄생에 대한 것일까. 지상에서의 그의 최초의 삶은 지금처럼, 아파트가 그의 사타구니까지 파고들고 자동차가 그의 골짝 골짝을 누비며 오염된 공기가 그의 허파를 상하게 하고 강탈하듯 사람이 그의 몸을 타고 오르는 그런 풍경은 아니었으리라. 최초의 그의 삶에는 빛나는 해와 고요한 달만이 있었으리. 푸른 나무 몇 그루, 그 나무에 깃든 새와 벌레들만이 있었으리. 달은 휘영청 주렴처럼 바위에 그 빛을 드리우고 바위는 그러면 빛으로 스민 달에게 뜨거웠던 자신의 지하에서의 삶을 비밀처럼 털어놓았으리. 나무는 새에게, 새는 바위에게 또 그런 식으로 서로를 드러내고 서로를 나누었으리.
팔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가까운 거리,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최초의 풍경을 몇 억년이나 지나온 그는 어쩐지 이 도시에서는 밤이면 텅 빈 버스를 타고 홀로 낯선 도시를 가로지를 것 같다. 승객은 한 사람도 없고, 뒷모습을 보이고 앉은 운전기사만 있는 밤 버스를 타고 말이다. 그러다 북한산대피소의 보랏빛 가을이 갑자기 가버린 것처럼, 어느 밤 아마도 첫눈이 내린다거나 하는 고요한 밤을 잡아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 제가 태어난 땅 속, 그 뜨거운 지구의 내부로.
그가 한때 섭씨 1600도의 뜨거운 마그마였던 것처럼 내 인생도 한때 뜨거웠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안고 만지고, 그에게 나의 마음을 낱낱이 고백해야했다. 면전에서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는 살 수가 없었다. 종잡을 수 없던 그 격렬(激烈)이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숲에 들고부터, 숲에 사는 것들을 눈여겨보고부터였을 것이다.
얼마 전 시인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이라는 시집을 선물로 받았다. 허겁지겁 목차를 뒤졌지만 책 어디에도 그런 제목의 시는 없었다. 얇은 시집 한 권을 가슴에 품고 이번에는, 가만히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가만히 좋아한다는 것은 가령, 그와 내가 버스 한 정거장을 사이에 두고 한 동네에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는 그가 탄 버스가 올 때까지 연달아 앞의 버스들을 놓치는 것이다. 그러다 같은 버스에 올라타서는 저만치 뒤에 앉아, 앞에 앉은 고단한 그의 숭숭한 머리칼을 가만히 훑는 것이다. 그의 사소한 움직임, 손놀림이며 그가 하품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향한 거리풍경을 나도 향하고 그 풍경의 무엇이 그의 시선을 끌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러다 밤이 되어서는, 인수봉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텅 빈 밤 버스에 홀로 그를 태우고 밤새 도시의 거리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외로운 그는 텅 빈 버스에서는뜨거웠던 지난날을 떠올려도 좋으리. 눈물 몇 방울 흘려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승객은 없고, 절대 뒤돌아볼 리 없는 운전기사만 있을 것이므로. 그러면 나는 달빛 같은 것이 되어 밤 버스에 기어들어서는 그의 그간의 삶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게 되리라.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얌전히 서서 나는 그의 몸에 팔을 뻗는 대신 속으로 가만히 그를 거대한 영혼, 이라고 불러보는 것이다.